기원전 73년, 그 유명한 율리어스 케이사르(시저)가 27살일 때, 그 유명한 전설적인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있었다.
그는 74명의 검투사를 이끌고 세계 최강의 로마군대를 몇년동안 쩔쩔 매게 만든 역사적인
인물이다.
미드 광팬들을 프리즌 프레이크 만큼 미치게 만든, 스파르타쿠스는 13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kill Them all" 로 마무리 했다.
탈주 후 역사적인 진실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로마 밑 나폴리 위쪽 아피아 가도와 라티나 가도가 교차하는 도시 카푸아는 민영으로 검투사 양성소가 집중되어 있다.
스파르타쿠스는 남쪽 그리스 마케도니아에 접해 있고 동쪽은 흑해와 면해있는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 검투사이다.
이 시대에는 트라키아 지방에 아직 로마의 패권이 미치지 않았다.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삼은 뒤에는 마케도니아의 북쪽 국경을 방어할 의무도 로마가 떠맡게 되었기 때문에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려는 것이 상례인
미개인들과 그들의 이주를 막으려는 로마군 사이에는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스파르타쿠스도 이러한 형태의 전투에서 퍠했기 때문에 노예 검투사가 되었다.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 왕자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때만 해도 트라키아는 통일 국가가 아니고 여러 부족이 난립해 있는 것으로 보아 족장의 아들쯤으로 보인다고 한다.
어쨌든 지도자의 소질은 타고난 사나이였다.
죽임의 그림자를 끼고 사는 검투사의 봉기는 헐리우드 영화의 흥미를 자극할 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커크더글라스가 주인공 스파르타쿠스로 토벌군 사령관인 크라수스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맡았다. 이 영화는 영화이므로 작가적인 상상력인 넘치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기원전 73년,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에서 집단 탈출한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74명은 양성소에 있던 무기를 가지고 나와, 폼페이 배후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도망쳤다. 이 화산은 150여년 후에 대분화를 일으켜 폼페이를 분진으로 뒤덮게 한 그곳이다.
74명의 우두머리는 스파르타쿠스이고 부두목은 갈리아 출신의 크릭수스 였다. 그외 많은
게르만족이 그들을 따랐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사나이들은 일당백의 검술과 체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산을 내려와
주위 농장을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정부는 처음에는 이들을 가볍게 보았다. 3천명도 안되는 토벌대를 보냈지만, 검투사들은 가볍게 무찔러 버렸다.
탈주 검투사가 로마 정규군을 이겼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널리 주변 일대에 퍼졌다.
대농장의 노예들이 농기구를 버리고 베수비오의 스파르타쿠스로 모여들기 시작하다.
로마 정부는 이번에는 신중하게 대처하여 법무관 휘하의 2개군단을 토벌대로 보냈다.
그러나 2개군단은 전멸을 하고 만다.
로마군에 두차례의 승리는 이태리 남부 지방 전역에 퍼지게 되고, 그에게 가세한 사람들 중에는 농장 탈주 노예뿐만 아니라, 노무에 시달리는 빈민까지 합세하여 그의 세력은 기원전 72년 봄에는 7만명 정도로 불어나 스파르타쿠스와 크락수스로 양분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전력이 증강되자 스파르타쿠스와 크락수스사이에는 두사람의 견해 차이로 말다툼이
많아졌다. 크락수스는 물산이 풍부한 이탈리아 남부를 약탈하는 데 만족하고 있었고,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로마 정부는 기원전 72년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싶어하여 두 집정관을 반란에 투입한다.
2개군단 1만 5천명씩 이끌고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를 개별적으로 맞서게된다.
크락수스를 가르가노산으로 몰아넣어 전투를 벌어 크락수스를 죽이고 그의 반란군을 섬멸한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교묘히 추적을 따돌리고 아드리아 해를 따라 북상하고 추격하는
로마 4개군단을 피체노 근처에서 격파한다.
추적을 뿌리치고 북상을 게속하여 루비콘강 근처에서 갈리아 총독의 지휘로 남하하는 로마군을 격파시킨다. 스파르타쿠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있는 길이 열렸으나,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느닷없이 남쪽으로 돌린다. 아마 척박한 고향 땅보다 남쪽의 시칠리아에 정착하는
것이 낫다는 부하들의 요청을 무시하지 못해서 일까? .....
남쪽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마을은 약탈되고 그러나 많은 노예들과 빈민들이 스파르타쿠스의 휘하에 모여든다.
결정적인 것은 스파르타쿠스가 메시나 해협를 건너지 못할때 로마는 법무관 크라수스가 이끄는 8개군단 5만명이 배수진을 치고 노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첫번째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패배를 했다.
두번째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분발했는지 메시나 해협을 건너려고 하는 노예군을 산속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행운은 로마쪽이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은 제발로 산을 내려왔다. 배수진을 친 로마군의 기운은 노예군을 전멸시킨다. 대부분의 노예군은 전사했고 산을 이룬 시체에서는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포로로 잡힌 6천여명은 십자가에 매달려 오랜 고통을 겪은 끝에 죽었는데,
십자가형은 노예가 주인에게 반항했을 때 가해지는 가장 엄한 형벌이다.
아피아 가도에 연변에 줄지어 세워진 십자가는 수십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누구에게는 스파르타쿠스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었을 것이고, 로마는 시체속에 죽어있을 거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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